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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교육

연산군과 광해군 묘호, 다른 임금들의 묘호와 다른 이유는?

 

조선시대 왕 계보를 '태정태세문단세…' 노래로 많이들 외우시는데요^^  '태정태세문단세 예정연중인명선…' 노래는 조선의 1대 왕 태조부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등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에요.

그런데 왜 다른 왕들은 모두 '조'와 '종'으로 끝나는데, 연산군과 광해군 묘호는 '군'이 붙었을까요? 모두 폐위된 임금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연산군과 광해군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연산군과 광해군 묘호를 통해 임금 묘호의 법칙을 알아볼게요 :)

 

 

'태정태세문단세 예정연중인명선…'로 조선시대 임금의 이름을 외우는데요. 이는 임금의 이름이 아니라 '묘호(廟號)'라고 해요. 묘호는 왕이나 황제가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號)를 뜻해요. 그래서 태조나 정종, 태종 등은 신주의 이름이기도 해요.

이러한 임금들의 묘호를 정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는데요. 태조 시절 <조선왕조실록>에 '공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하니..'라고 나와있듯이, 공적이 있는 자는 '조', 덕망이 있는 자는 '종'으로 붙었어요. 공적이 있는 자는 나라를 세운 공이 있거나 나라의 정통을 다시 세운 왕들을 의미하며, 덕망이 있는 자는 덕이 출중하거나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을 의미해요.

임금들의 묘호를 정하는 사람들은 새로 등극한 왕 또는 왕의 아들, 2품 이상의 대신들로, 왕들이 살아생전 이룬 일들을 의논해 정했어요.

 

그렇다면, 연산군과 광해군 묘호는 왜 '조'와 '종'이 아닌 '군'이 붙었을까요?

임금들이 승하한 뒤에는 종묘에 모시게 되는데, 나랏일에 죄를 지은 사람은 종묘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묘호도 받을 수 없었고, '조'와 '종' 대신 '군'을 붙인 것이에요.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목표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가혹하게 숙청하였는데요. 연회나 사냥, 음행 등에 탐닉해 국가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까지 만들었어요. 결국 연산군은 반정으로 폐위가 돼요.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중립외교를 취했다는 이유로 폐위가 됐어요.

결국, 이들 모두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으로, 묘호를 받지 못해 '군'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 것이에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조'와 '종' 모두 좋은 묘호인 것 같은데요^^ 연산군과 광해군 묘호를 제외하면, 조선의 왕들은 '종'보다 '조'를 더 원했다고 해요. 이는 '덕이 있다'는 표현보다, 확실하게 '공이 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어요.

 

대표적인 예로 세조를 들 수 있어요. 세조의 묘호는 처음에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중 하나로 정하려고 했다고 해요. 하지만 아들인 예종이 '계유정난'을 근거로, 세조(世祖)를 밀어붙였어요.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1)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건인데요.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을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쫓아낸 것이에요. 그래서 예종은 아버지 세조의 명예와, 그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정통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세조를 주장했고, 결국 묘호를 세조로 관철시켰어요.

 

'종'이었던 묘호가 '조'로 바뀐 사례들도 있는데요. 선조는 원래 선종이었으며, 영종은 영조로, 정종은 정조로, 순종은 순조로 묘호가 변경되었어요. 이러한 이유에는 후대에 전쟁이나 각종 변란을 잘 극복한 공을 인정받거나 추존 받았기 때문이에요.

 

 

조선 2대 임금 정종은 262년 뒤에나 묘호를 받았는데요. <용비어천가>에는 우리나라 개국공신의 이야기가 있어요. 하지만 조선창업에 아무런 공인 없다고 본 세종은 정종을 <용비어천가>에 넣지 않았어요. 또한 왕이 죽으면 편찬하는 실록 또한 정종은 없었어요. 후에 태종실록에서는 그 전대를 비워둘 수 없어 실록을 같이 만들었지만, 이때에도 정종의 묘호는 없었어요.

 

정종이 묘호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이렇게 홀대를 받은건 태종시절부터의 왕권보호 노력 때문인데요. 일가친척이 왕권에 도전할 것을 심히 우려했던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정종이 임금 자리를 내준 다음에도 오래 산 점과 17남 8녀나 되는 수많은 자녀 등을 걱정했어요. 그래서 태종은 친인척들이 감히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왕실 족보를 분리했어요. 또한 정종의 아들들에게는 서얼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버렸어요.

결국 정종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묘호조차 받지 못하다가 숙종 7년에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받았어요.

 

 

연산군과 광해군 묘호에 '조'와 '종'이 아닌 '군'이 붙은 이유를 살펴보았는데요. 임금들에게 붙여지는 묘호의 원칙을 잘 알면, 임금들의 살아생전 업적도 이해하기 수월해지겠죠?^^

조선 임금들의 묘호의 법칙! 꼭 기억하시길 바랄게요 :)